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르만 괴링 (문단 편집) ==== 영국 본토 항공전 패배 ====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괴링은 전격전에서 육군만이 각광을 받은 것에 불만을 가졌고, 영국을 무력화 시키는 데에는 공군만으로 충분하다고 호언하며 영국 폭격을 단행했다. 그러나 공격 부대는 독일 공군이 재건당시 '''육군을 지원하는 공중포병'''의 컨셉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가진 것은 항속거리도 짧고 방어력도 탑재량도 충분치 않은 중형 폭격기와 단거리 전투기가 대부분인데다[* 물론 독일 공군이 저렇게 성장한게 괴링만의 잘못은 아니다. 오히려 괴링은 장거리 폭격기에도 관심을 가졌었는데 [[He 177]]의 개발 지연에 몹시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거나 연설에서 4.5톤 정도의 폭장을 하고 대양을 가로질러 뉴욕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폭격기를 가질 수 있으면 매우 기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중폭격기 열성론자이던 [[발터 베버]]는 여타 장교들과의 마찰이 심했었는데, 베버가 의문의 추락사고로 사망했을 때 암살 음모론도 존재한다. 여튼 베버 사후 독일에서 중폭격기는 사실상 찬밥 신세가 된다. 이를 토대로 보면 괴링도 딱히 베버의 이론을 크게 지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당시 히틀러는 장기전이 아니라 연합군들의 허를 찔러서 속전속결로 끝내지 않으면 1차대전 반복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공격기와 전투기, 경폭격기 위주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고 무엇보다 폭격기는 가격도 비싸고 유지비도 많이든다. 왜 현대에 폭격임무를 수행하는것이 미국을 제외하면 폭격기가아닌 전투기나 공격기가 수행하는 이유도 유지비가 많이들어서 효율성이 떨어져서이다. 거기에 초기에는 빨리 재무장을 하기위해서 폭격기는 뒷전이 되었을테고 전쟁중에도 소모량이큰 전투기나 전차, 개인화기등에 집중하느라 폭격기는 우선순위에서 밀렸을것이다.], 영국군의 체계적이고 집요한 요격을 받는 바람에 귀중한 공군 전력의 상당부분을 영불해협과 [[런던]] 위에서 잃어버린다. 단순히 유럽 본토에서의 전투만 생각했으면 저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테지만, 문제는 전선이 너무 늘어나서… 그 외에 실책이라고 보기는 애매한 것으로는 근접 호위를 지시한 것이 있는데, 폭격기 조종사들이 불안하다고 징징거리고 괴링이 근접 호위를 지시하는 트롤링(…)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는 철저하게 전투기 조종사의 입장에서 본 시각이며, 폭격기가 날아가야 하는 거리가 멀어지면 선 제압 방식의 호위로는 폭격기를 효과적으로 호위하기가 어렵다. 물론 영국 남동부 정도면 선 제압 방식으로도 그럭저럭 호위가 가능하지만 런던쯤 가면 근접 호위가 필수적이다. 당연히 공군 전체를 지휘하는 괴링의 입장에서는 전투기 조종사들의 입장 뿐 아니라 폭격기 조종사들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호위할 필요가 있으므로 근접 호위를 지시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보기는 애매하다. 애당초 괴링은 폭격기 호위를 항속거리가 긴 Bf110에 넘기려고 했는데 야들이 영국 공군의 밥(...)이 되어버려서 고육지책으로 그나마 영국 요격기를 잡을 수 있는 Bf109가 호위를 맡게되는 삽질을 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충분한 전투 능력을 갖춘 장거리 전투기 없이 영국 공군을 얕보고 무리하게 Bf110을 투입한 것이 실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욱 희한한 건 전투기 숫자가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전투기 생산속도조차 신경쓰지 않았다.''' 그 결과 매월 영국의 전투기 생산 숫자는 독일의 것을 한참 추월해서 '''마침내는 보유 전투기 대수조차도 영국에 밀려버린다.''' 이런저런 끝에 공군은 공군대로 날려먹고, 결국 영국 상륙 계획([[바다사자 작전]])까지 중단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그러나 이는 괴링만의 잘못은 아니다. 괴링이 저런 판단을 한 것은 조종사들의 격추 보고와 초기 영국 전투기 숫자에 의한 것인데, 조종사들의 격추 전과 자체가 과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은 전투기를 생산하는 데 사활이 걸려 있었기에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전투기 생산량이 독일의 2배에 달했고, 손실량을 거의 보충하고 있었던 반면에, 독일은 전투기 손실 자체는 영국보다 적었으나 손실량을 보충량이 따라잡지 못하는 상태였다. 게다가 이후 독일이 런던 폭격에 집중하면서 전투기 생산 공장이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자 이 격차가 더더욱 벌어진다. 그래도 이런 문제등의 교훈으로 괴링은 보다 엄격한 전과 확인 체계를 갖추라는 지시를 내려서 보다 정확하게 전과를 집계할 수 있었으니 이때까지는 그럭저럭 멀쩡했다고 볼 수 있다.[* 덕분에 독일 공군의 격추 기록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더 정확한 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교차 검증은 필수적이지만 말이다.] 애당초 바다사자 작전은 영국의 월등한 해군력으로 인해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작전이었다. 영국에 상륙한 독일군이 [[영국 해군]]에 의해 빠르게 고립된다는 이유로 독일 군부에서도 바다사자 작전은 그리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이유 때문에 괴링이 폭격만으로 영국을 굴복시키겠다고 큰소리 칠 때 [[크릭스마리네]]의 최고사령관인 [[에리히 레더]] [[제독]]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어차피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륙전인데 '''괴링이 스스로 책임지겠다고 했으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